Part 1 · Ch.02 시리즈 A
약속의 한 쪽을 — 자기 손으로 — 정확히 — 끊은 다음에야, 약속의 다른 한 쪽을 — 자기 손으로 — 끝까지 — 가져갈 수 있다.
2016.06.[XX] / 09:00 / 성균관대 자연과학캠퍼스, 박사 예심실
박사 예심을 봤다.
5년 3개월 만이었다. 2011년 3월에 박사과정 1년차로 입학해서, 2016년 1학기의 — 봄과 초여름 사이의 어느 시점에 — 예심실의 책상 앞에 앉기까지.
그 5년 3개월 동안, 나는 — 회사를 만들었고, 5,000만원의 자본금을 5명의 책상으로 바꿨고, 정부 과제를 받았고, 성균관대 첫 매출을 받았고, N사로부터 첫 라운드를 받았고, 다섯 번의 VC 거절을 받았고, 김현화·이태성·한민웅을 회사 안에 앉혔고 — 박사 논문 초고를 — 한 번 — 끝까지 — 썼다.
박사 논문 초고는 — 회사 일이 가장 바빴던 어느 두 달의 새벽들에 — 자취방에서 — 카페에서 — 학교 도서관에서 — 한 페이지씩 — 정확히 — 썼다.
쓰는 동안 한 번도 — 이 초고를 내가 끝낼 것인가 를 — 의심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 예심실의 책상 앞에 앉은 그 6월의 오전 9시에, 나는 — 처음으로 — 이 초고를 끝까지 가져가야 하는가 를, 자기 자신에게 정직하게 물었다.
답을 — 그 자리에서 한 번에 — 받아내지는 못했다.
다만 — 예심을 — 끝까지 — 자기 손으로 — 받기로 — 결정했다.
예심위원은 — 다섯 분.
지도교수가 — 가장 가운데. 다른 네 분은 — 같은 학과의 다른 교수님들.
발표 — 30분. 질의 응답 — 30분.
발표를 마치고, 첫 질문이 — 지도교수에게서 나오지 않았다. 다른 한 교수님이 — 한 번 안경을 올리시고는, 짧게 한 마디를 하셨다.
"…류성태 군."
"…네."
"…자네 — 회사도 한다고 — 들었네."
"…네."
"…논문은 — 회사 일과 — 어느 정도 — 겹치는 주제 — 인 거 같은데."
"…네. 일부는 — 겹칩니다."
"…그러면 — 자네는 — 이 논문이 — 학위 를 위한 — 논문인가, 회사 제품 을 위한 — 논문인가."
회의실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지도교수님이 — 그 자리에서 — 옆자리 교수님 쪽으로 짧게 고개를 돌리셨다. 그리고는 — 잠깐 — 답을 — 자기가 가로채려 하시다가 — 멈추셨다.
지도교수님은 — 만류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만류는 — 답을 — 가로채는 일이기도 했다. 가로채지 않으심으로써, 그분은 — 그 자리에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 내가 — 직접 — 말하게 — 두셨다.
나는 — 잠시 답을 골랐다.
"…학위 — 를 위한 — 논문 — 입니다."
이 한 마디를 한 다음, 나는 — 자기 자신에게 — 한 번 — 짧게 — 다른 한 마디를 — 더 — 했다. 그러나 — 이 학위를 — 받으면 안 되는 학위라는 것을, 나는 — 이 자리에서 처음으로 — 알게 됐다.
이 한 마디는, 그 자리에서는 —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예심은 — 통과됐다.
다섯 분 모두 — 통과를 주셨다.
예심실을 나오는 길에, 지도교수님이 — 복도에서 잠깐 나를 잡으셨다.
"…성태야."
"…네."
"…너 — 이 학위, 받을 거니."
나는 — 그 자리에서 답을 — 한 번에 — 받아내지 못했다.
"…교수님."
"…응."
"…한 — 일주일만 — 시간을 — 주실 수 있을까요."
"…응."
지도교수님은 — 그 자리에서, 더 이상의 말씀을 보태지 않으셨다.
복도를 나오면서, 나는 — 한 가지를 — 자기 안에서 — 정직하게 — 알아냈다.
지도교수님은 — 내가 이 학위를 받지 않을 가능성 을 — 이미 — 알고 계셨다.
알고 계신 채로, 만류하지 않으셨다. 한 일주일이라는 시간을 — 그 자리에서 — 한 번 더 — 주셨다.
그 일주일이 — 6,920만원의 약속을, 자기 손으로 끊는 데에 — 자기 자신에게 주는 — 마지막 — 한 박자였다.
2016.06.[XX] / 23:00 / 학교 인근 작은 오피스, 빈 회의실
일주일의 첫 밤, 나는 — 회사의 빈 회의실에 — 혼자 앉아 있었다.
책상 위에 — 노란 대학노트 한 권. 박사 1년 차에 학교 앞 문구점에서 다섯 권 사 둔 것 중 — 마지막 한 권이었던, 그 노트.
그 노트의 첫 페이지에는 — 5년 3개월 전에 적은 한 줄이 — 그대로 있었다.
3월 12일. 법인. 구름.
그 한 줄 아래에, 나는 — 그 6월의 밤에 — 새로운 한 줄을 — 적었다.
8월 — 박사 학위 — 받지 않기로.
6,920만원 — 회사 통장에서 — 학교로.
이 두 줄을 — 노트에 적은 다음, 나는 — 의자에 한참을 앉아 있었다.
회사 통장에는 — 그 시점에, 다음 달 월급을 — 4개월치 정도 — 줄 수 있는 돈만 — 남아 있었다.
거기서 — 6,920만원을 — 빼낸다는 것은, 다음 달 월급을 — 1.5개월치만 — 줄 수 있는 회사가 된다는 의미였다.
1.5개월. 1.5개월 안에, 우리는 — 시리즈 A 클로징을 — 끝내야 했다.
그 1.5개월의 산수를, 그 자리에서 한 번 더 봤다.
답은 — 어떤 산수로도 — 안 맞았다.
산수가 안 맞는데도, 나는 — 그 두 줄을 — 노트에 적은 다음 — 한 번도 그 두 줄을 — 다시 지우지 않았다.
이 두 줄을 지우지 않는 결정이, 그 6월의 밤에, 자기 자신에게 한 — 한 가지의 — 가장 정직한 — 어른의 — 결정이었다.
2016.07.[XX] / 14:00 / 성균관대 산학협력단
3년 7개월 만에 — 다시 — 산학협력단을 찾았다.
이번에는 — 입주 면접의 자리가 아니었다. 6,920만원을 — 학교에 — 정확히 — 입금하는 — 결제 자리였다.
산학협력단 담당자 분은 — 3년 7개월 전에 큰 호실은 지금은 안 어울려서요 의 답을 받아 주신 — 그분이었다. 1년 전에 — 큰 호실에 어울리는 회사로 자라셨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 첫 매출 미팅에서 한 마디를 보태 주신 — 그분이었다.
"…류 대표님."
"…네."
"…오랜만이네요."
"…네. 오랜만입니다."
"…박사 — 정리하시고 오시는 거죠."
"…네."
담당자 분은 — 그 자리에서, 왜 라고 묻지 않으셨다.
물으시지 않은 그 한 가지가, 그 분이 — 학교라는 — 어느 큰 — 어른의 자리에서 — 나에게 보여 주신 — 또 한 가지의 — 너그러움이었다.
서류를 — 한 장 한 장 — 사인했다. 마지막 사인의 자리에서, 그 분이 — 한 마디를 보태셨다.
"…6,920만원 — 정확히 — 입금하시면, 박사 학위 — 자격 — 자동으로 — 정리됩니다."
"…네."
"…학교는 — 류 대표님이 — 약속의 한 쪽을 — 정확히 — 정리하셨다는 — 한 가지를, 학교의 어느 자리에서 — 항상 — 알고 있겠습니다."
이 한 마디 앞에서, 나는 — 한 번 — 답을 못 했다.
학교는 — 약속을 어긴 사람으로 나를 보지 않으셨다. 학교는 — 약속의 한 쪽을 — 자기 손으로 — 정확히 — 정리한 사람으로 — 나를 보아 주셨다.
이 한 가지의 — 학교의 — 어른의 — 시선의 너그러움이, 그 자리의 나에게는 — 그 후 9년 동안 — 회사 안의 어느 어려운 자리마다 — 한 번씩 — 다시 — 떠오르게 된다.
학교가 — 한 사람을 — 약속을 어긴 사람으로 보지 않으셨다는 것이, 그 사람이 — 그 후 9년 동안 — 다른 사람들에게 — 한 번도 — 약속을 어기지 않으려고 — 자기 자신을 — 견디게 한 — 한 가지의 자세였다.
2016.07.[XX] / 18:00 / 학교 인근 작은 오피스
회사 통장에서 — 6,920만원이 — 학교로 — 이체되는 — 그 알림이, 핸드폰에 떴다.
회사 통장 잔고는 — 그 순간 — 다음 달 월급을 — 1.4개월치 — 정도만 — 줄 수 있는 — 잔고가 됐다.
석유남이 — 자기 책상에서 — 그 화면을 한 번 — 같이 — 봤다.
"…형."
"…응."
"…우리 — 지금 — 1.4개월 — 남았어요."
"…그러게."
"…1.4개월 안에 — 시리즈 A 클로징 — 안 되면 — 어떻게 해요."
나는 — 그 자리에서 — 답을 — 길게 — 고르지 않았다.
"…안 되면 — 우리 두 사람 월급 — 안 받지 뭐."
석유남이 — 한 번 짧게 웃었다. 그러나 — 그 웃음 안에는 — 한 가지 — 다른 — 무엇이 — 들어 있었다. 두 사람 월급을 안 받기로 한 회사가 — 7월의 어느 오후에, 산학협력관이 아니라 — 학교 인근 작은 오피스에서 — 다음 달 월급의 — 1.4개월치 — 잔고로 — 회사의 — 어느 — 다음 자리를 — 결정해야 한다는 사실을, 그 친구는 — 그 자리에서 — 자기 안에 — 다시 — 자리 잡게 하고 있었다.
자리 잡게 하면서도 — 그 친구는 — 자기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석유남은 — 12년 9개월 동안, 자리가 흔들리는 어느 시점에도 — 한 번도 — 자기 자리를 — 떠나지 않은 사람이었다.
이 한 가지의 자세가, 7월의 그 1.4개월 잔고의 회사를 — 다음 달의 — 시리즈 A 클로징의 자리까지 — 견디게 한 — 한 가지의 — 가장 깊은 — 자본이었다.
2016.07.[XX] / 21:00 / 어머니께 전화
그날 밤, 나는 — 어머니께 — 전화를 — 못 드렸다.
전화를 — 드리려고 — 핸드폰을 — 두 번 들었다.
두 번 — 다시 — 책상 위에 — 엎어 두었다.
어머니께서 — 내가 박사를 — 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그 시점에 — 알게 되시면 — 어머니의 어느 한 자리가 — 어떻게 — 흔들릴지를, 그 자리의 나는 — 한 번도 — 정확히 — 가늠할 — 수 — 없었다.
가늠할 수 없는 채로, 어머니께 — 전하지 않기로 — 결정했다.
10년 뒤, EXIT 사인이 끝난 그날 밤의 통화에서, 어머니께서 — 엄마는 약속이 절반인지 전체인지를 안 따진 지 한참 됐다 라고 — 한 마디 해 주실 때까지, 어머니께서는 — 내가 박사를 받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해, 한 번도 — 직접 — 묻지 않으셨다.
묻지 않으심이 — 어머니께서 — 그 9년 동안 — 자기 아들에게 보내 주신 — 가장 큰 — 한 가지의 — 침묵의 허락이었다.
그 침묵을 — 받을 자격이 있는 아들이 되기 위해, 그 후의 9년의 회사를 — 자기 손으로 — 끝까지 — 가져가야 했다.
이 한 가지의 — 자기 자신에게 한 — 한 가지의 — 약속이, 7월의 그 밤에 — 새로 — 시작됐다.
— Episode 5.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