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1 · Ch.01 0001 — 출항
비어 있다는 것은 — 채워질 자리가 있다는 뜻이다.
2014.04.[XX] / 16:23 / 산학협력관 201호
처음으로 — 우리 회사 통장에, 우리가 만든 것을 사고 송금한 누군가의 돈이 들어왔다.
핸드폰에 알림이 떴다.
[입금] 30,000,000원
보낸곳: 성균관대학교 정보통신공학부
석유남이 자기 책상에서 화면을 보고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형."
"…응."
"…우리 — 매출이 처음으로 — 났어요."
석유남이 그 자리에서 일어났다. 책상 옆을 두 발자국 걸어와서, 내 핸드폰 화면을 같이 봤다. 두 사람이 한 화면을 한참 봤다.
"…금액이 — 삼천이에요?"
"…응."
"…삼천만원이에요?"
"…응."
석유남이 한 번 웃었다. 나도 한 번 웃었다.
회사를 시작한 지 — 1년 1개월 만이었다. 그 1년 1개월 동안 — 이 회사의 통장에 들어온 돈은, 내가 8년 동안 모은 5,000만원의 자본금과, 정부 과제로 받은 단계별 집행금 정도였다. 그 외에는 — 아무 것도 없었다.
이 30,000,000원은 — 그 1년 1개월 동안 처음으로 — 우리가 만든 것을 사고 자기 돈을 보낸 누군가의 돈이었다.
자본금과 정부 과제금은 — 우리에게 잘 해 주세요 라고 누군가가 미리 보내 준 돈이었다.
이 30,000,000원은 — 우리가 만든 것이 자기에게 도움이 됐다 고 누군가가 보내 준 돈이었다.
두 종류의 돈은 — 같은 통장에 들어가도, 다른 무게를 가진다.
그 무게의 차이를 — 그 오후에 우리 두 사람은 처음으로 알게 됐다.
2013.04.[XX] / 21:14 / 산학협력관 201호
회사를 시작한 지 한 달이 지난 4월 어느 저녁이었다.
자본금 5,000만원 중 — 그 시점에 이미 1,500만원이 빠져 있었다. PC 부품, 책상 두 개, 의자 두 개, 도메인 결제, 명함, 노트북 한 대, 소프트웨어 라이센스 몇 개. 한 달에 1,500만원이 빠져나간다는 것은 — 5,000만원이 약 3개월 반 만에 0이 된다는 뜻이었다.
3개월 반 뒤의 회사 통장은 — 회사를 닫을 통장이었다.
석유남은 그 시점에 합류한 지 한 달이 채 안 됐다. 첫 월급을 한 번 받은 다음이었다. 200만원이었다. 그 200만원도 5,000만원에서 빠진 것이었다.
그 저녁, 나는 석유남에게 통장 잔고를 보여 줬다.
"…형."
"…응."
"…이거 — 3개월이면 — 끝나요."
"…그러게."
"…어떻게 해요."
"…정부 과제, 하나 들어가야 할 것 같아."
석유남이 잠시 화면을 봤다. 한 번 한숨을 쉬었다. 그 한숨은 — 자기가 코드를 더 짜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인 사람의 한숨이 아니었다. 자기가 코드 외의 어떤 일에 — 회사의 한 달이 넘는 시간을 써야 한다는 것을 — 처음으로 알게 된 사람의 한숨이었다.
"…과제는 — 어떤 거예요?"
"…미래창조과학부 — 정보통신산업진흥원 — SW R&D 과제."
"…그게 — 뭐예요."
"…나도 잘 모르겠는데, 일단 — 신청해 보면 되지 않을까."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 그 저녁 우리 두 사람의 그 무지함이, 그 후 12년 9개월 동안 우리가 통과한 모든 과제·투자·인수·매각의 — 첫 한 줄이었다.
처음에는 — 무엇인지 모르고 신청한다.
신청하면서 무엇인지 알게 된다.
알게 되면서 — 자기가 그것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인지를 결정한다.
자격이 있다고 결정하면 — 받는다.
받고 나면 — 그것이 무엇인지를 비로소 처음부터 다시 배운다.
이 순서는 — 정부 과제에서나, 시리즈 A 에서나, 인수 협상에서나, EXIT 사인에서나 — 12년 9개월 동안 단 한 번도 변하지 않았다.
신청서를 쓰는 데 — 3주가 걸렸다.
서식이 22장이었다. 각 장마다 — 회사의 어떤 부분에 대한 어떤 종류의 답이 들어가야 했다.
회사 개요. 사업 분야. 기술 차별성. 시장 분석. 매출 계획 (3년치). 인력 계획 (3년치). 재무 계획 (3년치). 위험 분석. 기대 효과. 사업화 전략. 글로벌 진출 계획. 지식재산권 확보 전략. 산학연 협력 계획. 사회적 가치 창출 방안. 그리고 — 가장 어려운 한 페이지 — 연구 책임자 이력 및 핵심 인력 구성.
연구 책임자: 류성태. 박사과정 1년차.
핵심 인력: 석유남. 학부 4학년 휴학.
그게 회사의 전체 인력이었다.
22장 중 인력 구성 한 장이, 제일 짧았다. 두 명. 두 명이 끝이었다.
다른 어떤 칸의 어떤 답을 잘 적어도 — 그 한 장이 회사의 진짜 크기를 정직하게 말해 주고 있었다.
처음에는 — 그 한 장이 부끄러웠다. 다른 신청 기업들의 인력 구성표는 — 5명, 10명, 어떤 경우는 30명. 우리는 두 명.
3주째 신청서를 다듬으면서, 나는 그 한 장의 부끄러움을 — 다른 방향으로 다시 생각해 보기로 했다.
두 명이라는 사실은 — 약점이 아니라 — 우리의 정직함으로 적자.
신청서의 인력 구성 칸 옆에, 자유 기재 칸이 한 줄 있었다. 거기에 한 줄을 적었다.
현재 인력은 두 명입니다. 본 과제 수행 후 인력을 늘릴 계획이며, 본 과제로 받는 자금의 70%를 인력 충원에 사용하겠습니다.
이 한 줄을, 나는 신청서를 제출하기 전 — 마지막에 한 번 더 다시 읽어 봤다. 정직한 한 줄이었다. 정직한 한 줄이 — 22장의 다른 모든 칸의 답을 받쳐 줄 수 있을지를 — 그 자리에서 자기 자신에게 물었다.
답은 — 모르겠다, 였다. 다만 — 그 한 줄을 빼고 신청서를 내는 것보다는 — 빼지 않고 내는 것이 — 그 자리의 나에게 더 정직한 결정이라고 생각했다.
신청서를 제출했다. 5월 둘째 주였다.
발표 평가는 — 한 달 뒤였다.
장소는 정부청사 회의실. 발표 시간 15분, 질의 응답 15분. 모두 30분.
발표 전날 밤, 나는 산학협력관 201호에서 — 석유남에게 발표 연습을 했다.
"…형."
"…응."
"…그 슬라이드 — 22번째 슬라이드 말이에요."
"…응. 인력 구성."
"…형. 그거 — 솔직하게 가실 거예요?"
"…그래야 하지 않을까."
"…다른 회사들은 — 안 그래요. 인력을 — 부풀리는 건 — 거의 다 한대요."
"…알아."
"…그러면 우리는 왜 안 그래요."
나는 잠시 답을 골랐다.
"…우리가 — 이 과제 받으려고 부풀리면, 받고 나서도 부풀려야 하잖아. 받고 나서 부풀린 게 들통나면 — 과제가 회수되고. 그 다음 다른 과제에서도 — 우리가 부풀리는 회사로 — 이미 분류돼."
"…그러면 — 처음부터 — 안 부풀린다는 거예요?"
"…응."
석유남은 잠시 화면을 봤다. 그 잠시 동안, 그 친구의 표정에 — 한 가지 결정이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그 결정이 — 그 친구가 12년 9개월 동안 회사 안에서 가져갔던 한 가지 자세의 — 첫 페이지였다.
"…알겠어요. 형."
"…고맙다."
"…고맙긴요. 저는 — 그게 형 스타일이라는 거 알았으면, 제가 안 물었을 거예요."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석유남의 그 한 마디가 — 그 후 12년 9개월 동안 우리 두 사람이 일하는 방식의 — 짧은 정의였다.
형 스타일이라는 거 알았으면, 제가 안 물었을 거예요.
이 한 줄은 — 동의가 아니라, 신뢰의 한 표현이었다. 동의는 — 같은 결정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만들어진다. 신뢰는 — 다른 결정을 할 수도 있는 사람이, 자기 결정을 한 번 미루고, 다른 사람의 결정을 자기 안으로 받아들이는 — 한 방향의 동작에서 만들어진다.
석유남은 — 12년 9개월 동안 그 한 방향의 동작을 — 셀 수 없이 했다.
발표 평가는 — 떨렸다.
회의실 한가운데에 길쭉한 책상. 그 책상 너머에 — 평가 위원 일곱 명. 대학 교수 네 명, 정부 출연 연구소 연구원 두 명, 산업계 전문가 한 명. 모두 50대~60대로 보이는 분들이었다.
내 발표를 시작하기 직전, 위원장님이 마이크를 한 번 톡톡 두드렸다.
"…발표자 — 류성태 씨, 박사과정이라고요?"
"…네."
"…박사 — 잘 하시면서 — 회사도 — 같이?"
"…네."
위원장님이 옆자리 위원 한 분과 짧게 눈을 마주쳤다. 그 눈맞춤의 의미를 — 나는 그 자리에선 정확히 읽지 못했다.
발표를 시작했다.
15분이었다. 22장의 슬라이드를 — 슬라이드 한 장당 40초 정도. 내가 그 회사를 시작한 이유. 우리가 만들고 있는 것. 그것이 누구에게 어떤 가치를 줄 수 있는지. 우리의 기술적 차별성. 시장 규모. 그리고 — 인력 구성.
22번째 슬라이드를 화면에 띄웠다. 두 명의 이름이 거기 있었다.
"…현재 인력은 두 명입니다. 본 과제로 받는 자금의 70%를 — 인력 충원에 사용하겠습니다."
발표를 끝냈다.
질의 응답이 시작됐다. 첫 질문은 — 위원장님이 아니라 — 옆자리 위원 한 분이 했다.
"…발표자님, 이 슬라이드 22번 — 인력 구성요. 솔직히 — 좀 — 신선하긴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다른 회사들은 — 보통 — 부풀리잖아요."
"…네. 알고 있습니다."
"…근데 — 솔직히 말씀드리면 — 평가하는 입장에선 — 이게 더 어렵습니다."
"…더 어렵다는 게 — 어떤 의미인가요."
"…부풀린 회사는 — 우리가 부풀린 부분을 깎으면 됩니다. 솔직한 회사는 — 우리가 어디를 깎아야 할지가 — 안 보입니다."
위원분이 잠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가 — 그 회의실의 그 자리에서 — 적인지 우군인지를 — 나는 그 순간 정확히 분간하지 못했다.
"…그래서 — 발표자님이 솔직한 — 한 가지 더 — 답해 주시기 바랍니다."
"…네."
"…이 과제 — 떨어지면. 회사 — 어떻게 됩니까."
나는 잠시 답을 골랐다.
평가 위원 앞에서 — 우리는 망한다 고 답하면, 그것이 또 어떤 평가의 칸에 어떻게 작용할지 — 나는 그 자리에서 가늠할 수 없었다.
가늠할 수 없는 채로 — 정직하게 답했다.
"…3개월 안에 — 회사 통장이 비웁니다."
회의실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위원장님이 한 번 안경을 올렸다. 옆자리 위원 한 분이 — 작게 한 번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답변 — 잘 들었습니다."
발표가 끝났다.
2013.07.[XX] / 14:00 / 산학협력관 201호
한 달 뒤, 평가 결과 공문이 왔다.
선정.
지원금: 1억 5,000만원. 1년 6개월 분할 집행.
석유남이 그 공문을 화면에 띄웠다. 두 사람이 한 화면을 한참 봤다.
"…형."
"…응."
"…우리 — 1년 6개월 — 살아남았어요."
"…그러게."
"…그 22번째 슬라이드 — 솔직한 거 — 통했네요."
"…그러게."
석유남이 한 번 웃었다. 나도 한 번 웃었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그 1억 5,000만원이 — 5,000만원의 자본금이 끝나가던 그 시점의 우리 회사의 — 두 번째 새벽이었다.
첫 새벽은 — 8년 동안 모은 5,000만원의 새벽.
두 번째 새벽은 — 우리가 처음 다른 사람에게 우리는 솔직한 회사입니다 라고 보여 준 22번째 슬라이드의 새벽.
세 번째 새벽이 — 그 다음 해 봄에 왔다.
2014.03.[XX] / 11:00 / 성균관대학교 자연과학캠퍼스, 산학협력단
3월의 어느 오전, 성균관대학교 산학협력단에서 — 우리에게 미팅을 요청했다.
12년 9개월의 모든 미팅 중 — 그 미팅이 가장 짧았다. 15분이었다.
산학협력단 담당자 분이 — 1년 전, 우리의 입주 면접을 봐 주신 그 담당자 분이었다.
"…류 대표님."
"…네."
"…잘 지내시죠."
"…네."
"…저희 정보통신공학부가 — 전공 실습 교육 플랫폼을 — 올해 처음으로 — 본격적으로 도입합니다."
"…네."
"…그 플랫폼의 — 학생들이 — 코드를 짜는 도구로 — 구름 IDE를 — 도입했으면 합니다."
나는 잠시 답을 골랐다.
"…저희 — 도구를 — 학교가 — 사 주신다는 — 의미인가요."
"…네."
"…금액은요?"
"…1년에 3,000만원으로 — 시작하시지요. 정보통신공학부 전공 실습 — 1년 사용권."
나는 그 자리에서 — 답을 길게 고르지 않았다.
"…네. 감사합니다."
"…별 말씀을. 류 대표님이 — 1년 전에 — 우리 학교 산학협력관 입주 면접에서 — 큰 호실은 지금은 안 어울려서요 라고 답하신 거 — 저는 —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
"…네."
"…올해는 — 좀 — 큰 호실에 어울리는 회사로 — 자라셨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그 자리에서 — 답을 못 했다.
12년 9개월 동안 — 누군가가 우리 회사에게 — 그렇게 따뜻한 한 마디를 한 적이 — 그 자리가 처음이었다.
미팅이 끝나고, 산학협력단 사무실을 나오면서, 나는 — 1층 복도에서 한참을 멈춰 서 있었다.
복도 끝, 1층 로비의 게시판에 — 학교 학사 일정 표가 붙어 있었다.
그 표 한가운데 — 2014년 정보통신공학부 전공 실습 — 1학기 운영 이라는 한 줄이 있었다.
그 한 줄 옆에 — 작은 글씨로 — 사용 도구 안내가 붙어 있었다. "코드 편집기: 구름 IDE".
나는 그 작은 글씨를 한참을 들여다봤다.
성균관대학교가 — 6,920만원의 약속을 받고 나에게 박사 학위 트랙을 열어 준 그 학교가 — 1년 뒤 — 내가 그 약속을 어기기로 결심한 회사의 첫 고객이 됐다.
이 한 줄의 모순이 — 12년 9개월 동안 내 안의 어느 칸을, 한 번도 정리되지 않은 채로 — 둔 한 가지 무게의 시작이었다.
학교는 — 한 사람에게는 약속을 받고, 같은 사람의 회사에게는 돈을 줬다. 두 결정 모두 — 같은 학교가 한 결정이었다. 다만 — 다른 시기였다. 그리고 — 다른 사람이 그 결정을 했다.
같은 학교가 — 두 사람을 통해, 두 가지 결정을 했다는 사실이 — 그 1층 복도에서 처음으로 나에게 정직하게 보였다.
학교는 — 누군가의 약속을 받기도 하고, 누군가의 회사에 돈을 주기도 한다. 그 두 가지가 같은 학교 안에서 — 모순되지 않고 — 동시에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 그 학교의 — 한 가지의 너그러움이었다.
2014.04.[XX] / 16:24 / 산학협력관 201호(회귀)
30,000,000원이 — 회사 통장에 들어왔다는 알림이 — 한 번 더 뜬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나는 그 화면을 한참을 봤다.
석유남이 옆에서 —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형. 우리 — 이거 — 어떻게 쓸 거예요."
"…뭘."
"…이 삼천."
"……."
"…책상 — 한 개 더 살까요?"
나는 한 번 웃었다.
"…응. 사자."
"…누가 와요?"
"…아직 모르겠다. 그래도 — 책상은 — 미리 사두자."
석유남이 한 번 웃었다.
그 오후 — 우리는 학교 근처 중고가구점에 가서, 책상 한 개를 더 사 왔다. 5만원이었다. 의자 한 개도 같이 — 1만 5천원.
산학협력관 201호. 10평이 안 되는 그 호실에, 책상이 — 세 개가 됐다.
책상 한 개는 비어 있었다. 그 빈 책상 위에 — 그 오후의 그 알림이 떴던 핸드폰을 — 잠시 올려 두었다.
빈 책상 위에 핸드폰이 한참 있었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그 빈 책상이 — 그 후 12년 9개월 동안 우리 회사가 채운 — 첫 번째 빈자리였다.
그 자리에 — 다음 사람이 — 어떤 사람일지를, 그 4월의 오후에 우리 두 사람은 — 한 번도 가늠하지 못했다.
다만 그 자리가 비어 있다는 사실 자체가 — 그 자리에 누군가가 올 수 있는 회사가 되었다는 의미였다.
비어 있다는 것은 — 채워질 자리가 있다는 뜻이었다.
— Episode 7.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