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01 · Ep.06

첫 손, 석유남

Part 1 · Ch.01 0001 — 출항

첫 손, 석유남

처음 네 명은 내가 선택한 게 아니었다. 다섯 번째 한 명만은 — 내가 직접 선택했다.

2025.12.초 / 23:14 / 강남 단골 호프집

EXIT 사인이 끝난 그날 밤, 나는 석유남에게 전화를 걸었다.

"형. 어디야."

"…나? 사무실. 아직."

"내가 갈게."

"오지 마. 내가 가."

12년 9개월 동안 우리는 — 같은 자리에서 만나는 일이 점점 줄어들었다. 회사가 커질수록, 두 사람의 책상은 멀어졌고, 두 사람의 회의는 다른 방에서 열렸고, 두 사람이 같이 새벽에 라면을 끓일 일은 거의 사라졌다.

그날 밤 — 회사가 더 이상 우리 두 사람의 회사가 아니게 된 그날 밤 — 우리는 12년 9개월 만에, 가장 오래된 그 자리에 다시 앉았다.

학교 앞 호프집이었다.

석유남이 잔을 들었다.

"수고하셨습니다."

"너도."

"…수고는 형이 다 했지."

"내가 한 게 아니야. 네가 안 갔잖아."

석유남이 한 번 웃었다. 그 웃음을 — 나는 12년 9개월 전에 처음 본 적이 있었다.

그 처음의 자리가 — 2013년 3월의 어느 저녁이었다.


2013.03.[XX] / 19:30 / 학교 앞 호프집

세 번째 자리였다.

같은 친구를 같은 자리에 세 번째 앉혀 두고, 같은 말을 다른 각도로 세 번째 하고 있었다.

"형. 저 진짜 — 못 해요."

"왜."

"코드 잘 모르잖아요."

"그래서 가르쳐 줄게."

"형이 가르쳐 줘서 되는 거면, 진작 누가 했겠죠."

석유남은 그 시점에 — 만 스물 한 살이었다.

성균관대학교 컴퓨터공학부 학부 2학년 1학기를 막 마치고, 군 입대 직전의 자리에 — 그 자리에 — 마주 앉아 있었다. 입대 영장이 — 가방 한쪽에 — 꽂혀 있었다.

스물 한 살의 그 친구가, 잔을 한 번 비웠다. 비우는 동작이 — 평소보다 한 박자 천천했다. 평소엔 한 모금에 비울 사람이 — 그날 저녁엔 두 모금으로 나눠 비우고 있었다.

그 두 모금 사이의 짧은 멈춤이, 그날 저녁 내가 가장 정확히 읽은 단 하나의 신호였다.

석유남은 — 안 한다고 말하면서도, 마음의 어딘가에선 이미 한다고 결정한 사람의 동작을 하고 있었다.

다만 그 결정을 자기 입으로 꺼내려면 — 한 번 더 자기를 설득해 줄 사람이 필요한 거였다.

세 번째 자리는 — 그 한 번 더의 자리였다.


석유남을 안 지는 — 그 시점에 1년쯤이었다.

skima 의 9번째 멤버였다. 학부 1학년 후배. 영준이 형은 그 시점 이미 군 제대 후 졸업해서 어느 게임 회사에 가 있었고, 민호도 지훈도 수진도 다 자기 자리로 흩어져 있었다. skima 라는 이름은 — 8년이 지나면서 멤버가 한 번씩 바뀌었다. 9번째 멤버가 들어오던 학기에, 나는 이미 박사 2년 차였다.

석유남이 처음 동아리방에 들어오던 날을 — 나는 정확히 기억한다.

그 친구는 — 코드를 짜러 온 게 아니었다.

skima 가 무엇을 하는 곳인지, 코드가 무엇인지, IDE 가 무엇인지 — 그 시점엔 거의 모르고 들어왔다. 학과 선배들이 "형, 거기 가면 컴퓨터 잘 가르쳐 줘요" 라고 말해 줘서, 그 말 한 마디로 동아리방 문을 연 친구였다.

그 시기 skima 의 다른 멤버들은 — 9번째 멤버를 받아 들이는 데 망설임이 있었다. 한 멤버가 회의 끝에 나에게 작게 말했다.

"형. 쟤 — 거의 백지인데, 가르치는 게 일이 될 텐데요."

"…그러게."

"형이 가르치실 거예요?"

"…응."

그 한 마디 "응"이 — 그 후 12년 9개월의 가장 첫 줄이었다.


석유남에게 코드를 가르치는 데에는 — 1년 가까이 걸렸다.

처음 한 달은 — 자바스크립트의 변수 선언이 무엇인지부터였다. var x = 1 의 의미. 그 한 줄을 이해하는 데 그 친구는 — 다른 친구들이 한 시간이면 끝낼 것을 일주일 걸렸다.

다른 친구라면, 나는 한 달 만에 포기했을 것이다. 석유남은 — 포기하지 않게 만드는 한 가지를 가지고 있었다.

성실함이 아니었다.

자기가 못한다는 것을 — 자기 비난 없이 정직하게 인정하는 종류의 성실함. "형, 저 이거 진짜 모르겠어요. 한 번만 더 설명해 주세요." 이 한 줄을 — 그 친구는 부끄러움 없이 매주 두세 번씩 했다.

그 부끄러움 없음이 — 결국 그 친구를 가장 빨리 자라게 했다.

부끄러움 없이 모른다고 말하는 사람은, 부끄러움이 있는 사람보다 두 배 빠르게 모르는 것을 줄여 나간다. 그 단순한 산수를 — 그 시기 동아리방의 다른 멤버들은 본 적이 없었고, 나는 본 적이 있었다.

본 적이 있었기 때문에 — 1년을 가르쳤다.

1년 뒤, 석유남은 자바스크립트로 작은 게시판 한 개를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짤 수 있게 됐다. 그 게시판이 그 친구의 첫 작품이었다.


회사를 만들기로 결심한 그 저녁 호프집에서 — 여덟 명에게 "나 회사 만든다" 고 선언했을 때, 그 자리에 석유남도 있었다. 그러나 그 저녁 — 나는 석유남에게는 따로 한 마디도 보태지 않았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 한 친구의 침묵을 듣지 않은 것이, 그 후 한 달 동안 내 안의 어딘가를 계속 두드렸다.

한 달이 지나, 산학협력관 201호의 의자에 처음 앉은 다음 주에 — 나는 석유남에게 카카오톡을 보냈다.

술 한 잔 하자.

답은 5분 만에 왔다.

어디로 가요.


첫 번째 자리는 — 짧았다.

"…너 — 회사 들어와라."

석유남이 잔을 잠시 내려놓았다. 그 친구의 표정에는 — 놀람이 없었다.

"…저요?"

"응."

"…저 — 근데 — 형. 저 코드 — 잘 못 짜잖아요. 게다가 — 곧 군대 가요."

"…그건 알아."

"…그럼 왜요."

나는 그 자리에서 답을 길게 고르지 않았다.

"…너는 — 모른다는 걸 부끄러워하지 않잖아. 군대는 — 다녀와도 돼."

석유남이 잔을 한 번 더 들었다. 비우지는 않았다.

"…형."

"…응."

"…제가 — 회사를 — 망치면 어떡해요."

"…망치면 같이 망치지."

"…같이 망치는 게 — 가능한 일이에요?"

"…나는 —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해."

석유남은 그날 밤 — 답을 안 했다.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석유남은 한 마디 더 보탰다.

"…형이 — 4번까지는 — 부르지 마세요."

"…왜."

"…3번까지 부르시면, 제가 알아서 — 응. 한다고 할게요."

그 한 마디가 — 그 친구가 그 자리에서 사실은 이미 결정한 다음에 한 협상의 한 줄이었다.


세 번째 자리. 그 호프집의 그 자리가 마지막이라는 걸 — 두 사람 다 알고 있었다.

"…유남아."

"…네."

"…안 해도 돼."

석유남이 잔을 들었다. 들고 있는 동작이 — 평소보다 한 박자 길었다.

"…형."

"…응."

"…3번 부르신 거예요. 지금."

나는 — 그 친구의 그 한 마디를 받아들이는 데 — 잠깐의 정적이 필요했다.

"…그러게."

"…그러면 — 제가 — 응. 해야 하는 거예요."

석유남이 잔을 비웠다. 한 모금에 비웠다.

"…형. 한 가지만요."

"…응."

"…저는 — 형이 회사를 만들어서 가는 거 따라가는 거 아니에요."

"…그럼?"

"…저는 — 형이 12년 동안 — 저 같은 사람을 한 번도 떠나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아서 — 가는 거예요."

나는 그 한 마디 앞에서 — 답을 못 했다.

답을 못 했다는 것이, 그 자리에서 내가 그 한 마디에 대해 한 가장 정직한 답이었다.


2013.04.01 / 11:00 / 산학협력관 201호

다음 주 월요일 — 2013년 4월의 첫날 — 석유남이 출근했다.

산학협력관 201호. 책상 한 개. 의자 한 개.

석유남이 문을 열고 들어와서, 한 번 사방을 둘러봤다.

"…형. 저 — 어디 앉아요."

내가 의자를 한 번 봤다. 의자는 한 개였다.

"…잠깐만 기다려 봐."

10분 뒤, 학교 근처 중고가구점에 가서 — 똑같은 의자를 한 개 더 사 왔다. 1만 5천 원이었다. 책상은 — 그날 오후에 또 한 개 더 사 들였다. 5만 원짜리 같은 모델.

10평이 안 되는 호실에 — 책상 두 개가 됐다.

석유남이 자기 책상 앞에 앉았다. 자리에 앉으면서 — 한 번 더 사방을 둘러봤다.

"…형. 우리 — 모니터는요?"

"…나 거 같이 쓰자."

"…같이요?"

"…응. 다음 달까지만."

석유남이 한 번 웃었다. 그 웃음 안에 — "이게 회사구나" 하는 한 마디가 들어 있었다.

회사라는 단어를 — 그 친구는 그 자리에서 처음으로 자기 안에 자리 잡게 한 것 같았다.


석유남에게 첫 한 줄의 코드를 — 그날 오후에 짜게 했다.

내 모니터를 같이 보면서. 내 키보드를 — 그 친구에게 넘겨 주면서.

"…유남아. 이거 — 한 줄 짜 봐."

"…뭘요."

"…아무거나. console.log 한 줄."

석유남이 키보드 앞에 손을 올렸다. 한참을 멈춰 있었다. 그러더니 — 천천히 한 줄을 쳤다.

console.log("hello, goorm");

엔터를 쳤다. 화면에 — hello, goorm 이 떴다.

석유남이 그 화면을 한참 들여다봤다.

"…형."

"…응."

"…이게 — 회사의 첫 코드예요?"

"…아니. 회사의 첫 코드는 — 4년 전에 내가 짠 거야."

"…그럼 이건요?"

"…너의 첫 코드지."

석유남이 한 번 더 화면을 들여다봤다. 그러더니 — 작은 목소리로, 자기 자신에게 하듯이, 한 마디를 했다.

"…hello, goorm."

그 한 마디가 — 12년 9개월의 가장 첫 페이지였다.


2025.12.초 / 23:47 / 강남 단골 호프집 (회귀)

EXIT 사인이 끝난 그날 밤, 단골 호프집의 같은 자리에서, 나는 석유남에게 한 마디를 했다.

"…유남아."

"…응."

"…3번까지는 — 안 부를 거다."

석유남이 잔을 잠시 내려놓았다. 그 자리에서 한 번 웃었다. 12년 9개월 전, 동아리방의 게시판을 처음 짠 그날의 그 웃음과 — 같은 웃음이었다.

다만 그날의 웃음은 거절을 말하기 직전의 웃음이었고, 12년 9개월 후의 웃음은 — 12년 9개월을 함께 통과한 사람의 웃음이었다.

같은 웃음이었지만, 무게가 달랐다.

"…형. 무슨 — 다음이에요?"

"…응."

"…뭐 만드시려고요?"

"…아직 몰라."

"…그러면 — 왜 부르시려고 하셨어요."

"…부른 게 아니야. — 부른다고 한 거지."

석유남이 한 번 더 웃었다.

"…형."

"…응."

"…저는 — 형이 — 부르시면, 그게 1번이든 2번이든 3번이든 — 갈 거예요."

"…알아."

"…그래서 — 부르지 마세요. 저는 — 한 번 더, 제 자리를 — 제가 선택해 보고 싶어요."

나는 그 한 마디 앞에서 — 한참 답을 못 했다.

12년 9개월 전, 그 친구가 "형 옆에 있어도 되는 사람인지가 두렵다" 고 한 그 자리의 그 친구는 — 12년 9개월이 지나, "제 자리를 제가 선택해 보고 싶다" 고 말하는 사람으로 자라 있었다.

그 자람이 — 회사가 그 친구에게 — 그리고 그 친구가 회사에게 — 12년 9개월 동안 서로에게 갚은 무언가의 결과였다.

"…그래. 부르지 않을게."

"…고마워요. 형."

석유남이 잔을 들었다. 마지막 한 잔이었다.

"…수고하셨습니다."

"…너도."

두 잔이 부딪쳤다. 짧은 소리가 났다. 그 소리가 — 12년 9개월 전 동아리방의 그 "hello, goorm" 의 메아리였다.


— Episode 6.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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