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1 · Ch.02 시리즈 A
어떤 자본의 첫 입금은 — 우리가 어른의 자리에 끼었다는 것을 — 통장이 먼저 알게 해 준다.
2015.08.[XX] / 09:14 / 산학협력관 201호
핸드폰에 알림이 떴다.
[입금] 1,000,000,000원
보낸곳: N사 투자관리
석유남이 자기 책상에서 화면을 보고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 표정이 — 작년 4월 1,200,000원이 들어온 그날의 표정과 — 같은 종류였다. 다만 — 입금된 금액의 자릿수가 달랐다.
"…형."
"…응."
"…우리 — 통장에 — 억이라는 단위가 — 처음으로 — 들어왔어요."
"…그러게."
"…그게 — 어떤 기분이에요?"
나는 잠시 답을 골랐다.
"…모르겠다. 다만 — 내가 받는 기분이라기보다는 — 받아 든 기분 이야."
석유남이 한 번 끄덕였다. 우리 두 사람은 — 그 화면을 한참 봤다. 그러나 한참은 — 작년 4월의 한참보다는 — 짧았다.
작년 4월에는 — 1,200,000원이 들어왔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데에 — 한참이 필요했다. 1년 4개월이 지난 그 8월의 9시 14분에는 — 억이 들어왔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데에 — 짧은 한참이면 됐다.
회사가 — 자기 통장에 들어오는 돈의 자릿수에 — 그만큼은 — 익숙해진 회사가 되어 있었다.
그 익숙해짐을, 나는 그날 아침 처음으로 — 자기 자신에 대해 한 가지 의심으로 기록했다.
익숙해진다는 것은 — 무엇인가를 잃기 시작한다는 신호였다.
다만 — 그 시점에서 무엇을 잃기 시작했는지를 — 나는 정확히 모르고 있었다.
2015.05.[XX] / 14:00 / 분당 N사 본사 회의실
3개월 전이었다.
N사 본사. 분당. 회의실 한가운데에 — 길쭉한 책상. 그 책상 한쪽에 — 나와 석유남, 두 사람. 다른 쪽에 — 일곱 명의 임원과 투자팀.
가장 가운데 자리에 앉은 분이 — N사 CTO 진은숙 부사장 본인이었다.
"…류 대표님이라고요."
"…네."
"…발표 — 들어 봅시다."
15분 발표. 22장 슬라이드. 우리가 무엇을 만들고 있는지, 어디서 시작했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작년에 정부 과제 평가에서 — 같은 슬라이드 22번째 인력 구성 페이지를 — 그 자리에서 한 번 더 띄웠다. 두 명. 다섯 명이 됐다고 갱신만 했다.
"…현재 인력은 다섯 명입니다. 본 라운드의 자금의 70% 를 — 인력 충원에 사용하겠습니다."
발표가 끝났다.
질의 응답. 일곱 명 중 — 가장 먼저 입을 연 분은 — N사 CTO 진은숙 부사장 본인이었다.
"…류 대표.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네."
"…우리가 — 왜 — 댁의 회사에 — 투자해야 합니까."
회의실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이 질문은 — 평가 위원이 묻던 떨어지면 어떻게 됩니까 와는 — 다른 종류의 질문이었다. 평가 위원의 질문은 — 회사의 정직함을 묻는 질문이었다. 회장의 질문은 — 회사의 무게를 묻는 질문이었다.
평가 위원에게는 — 3개월 안에 통장이 비웁니다 가 답이 됐다. 부사장에게 — 같은 종류의 정직함은 — 답이 되지 않을 종류의 답이었다.
나는 잠시 답을 골랐다.
"…저희가 만들고 있는 것이, 한국에서 코드를 짜는 사람들이 — 한 번은 거쳐 가는 자리가 되고, 그 다음 — 국내를 넘어서 세계 어디서나 — 코드를 짜는 사람들이 — 한 번은 거쳐 갈 자리가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5년 뒤?"
"…네."
"…한국에서?"
"…한국에서. 그 다음은 — 다른 나라에서도."
부사장님이 한 번 안경을 올리셨다. 옆자리 임원분과 짧게 눈맞춤을 하셨다. 그 눈맞춤의 의미를 — 나는 그 자리에선 정확히 읽지 못했다.
"…근거는요."
"…저희 한 사람이 — 6년 전부터 — 이 카테고리를 — 가장 먼저 본 사람입니다."
"…먼저 본다는 것이 — 가장 먼저 만든다는 것은 — 아니지 않습니까."
"…네. 아닙니다. 다만 — 가장 먼저 본 사람이 — 가장 오래 견디면 — 가장 먼저 만들기도 합니다."
부사장님이 한 번 미소를 지으셨다. 그 미소가 — 그 회의실의 그 자리에서 — 적인지 우군인지를, 나는 그 순간 정확히 분간하지 못했다.
"…재밌는 답이네요."
발표가 끝났다.
미팅이 끝나고, 분당역까지 걸어 나오는 길에, 석유남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형."
"…응."
"…우리 — 거기 — 끝난 거예요?"
"…모르겠다."
"…근거는요 — 라는 질문에 — 가장 오래 견디면 이라는 답을 — 부사장님이 — 어떻게 받아들이실 거 같아요?"
"…모르겠다. 다만 — 다른 답이 — 그 자리에서 — 나에게 — 떠오르지 않았어."
석유남이 한 번 끄덕였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 그 부사장님의 재밌는 답이네요 라는 한 마디가 — 한국의 자본 시장에서 우리 회사에게 — 어떤 종류의 첫 평가였는지를 — 나는 그 후 10년이 지나서야 — 어렴풋이 — 알게 됐다.
재밌는 답 이라는 것은 — 틀린 답 이 아니라 — 익숙한 답이 아니다 라는 뜻이었다. 익숙한 답이 아닌 답을 한 사람을, 한국의 자본은 — 처음에는 신중하게 — 그 다음에는 흥미롭게 — 들여다본다.
2015.06.[XX] / 11:00 / 분당 N사 본사
한 달 뒤 — 텀시트가 왔다.
10억원. 보통주. POST-money 평가 가치 40억원. 첫 라운드.
석유남이 텀시트를 처음 들여다본 그날 저녁, 한 번 한숨을 쉬었다.
"…형."
"…응."
"…우리 회사가 — 이 종이에 — 40억 짜리 — 라고 적혀 있어요."
"…그러게."
"…우리 — 작년에 — 1,200,000원에 우리 첫 손님을 받은 회사잖아요."
"…그러게."
"…근데 — 여기엔 — 40억 이라고 적혀 있어요."
석유남은 그 종이를 한참을 들여다봤다. 그 한참 동안 — 그 친구의 표정에 — 한 가지 작은 두려움이 들어갔다 나갔다 — 하는 것이 보였다.
그 두려움의 정체를, 나는 그 자리에서 정확히 읽지는 못했다. 다만 — 그 친구가 그 두려움을 한 번 받아들인 다음 — 종이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 한 마디를 했다.
"…형. 우리 — 이거 — 받기로 해요."
"…응."
"…근데 — 이 종이에 적힌 40억이 — 진짜 우리가 — 그만큼 짜리 회사라는 — 의미는 — 아니죠?"
"…응."
"…그러면 — 뭐예요."
"…그건 — 우리가 40억 짜리가 될 수도 있다 고 — 누군가가 — 미리 — 적어 준 — 한 줄이지."
석유남이 한 번 끄덕였다.
그 끄덕임이 — 그 친구가 그 후 10년 동안 — 회사의 모든 평가 가치 라는 단어 앞에서 — 한 번도 흔들리지 않은 — 한 가지 자세의 — 첫 페이지였다.
평가 가치는 — 회사가 그만큼이라는 사실의 표시가 아니라, 회사가 그만큼이 될 수도 있다 고 누군가가 적어 준 한 줄이라는 것. 이 한 줄을 — 자기 안에 정확히 들고 있는 사람만이, 그 다음 모든 라운드의 모든 평가 가치 앞에서 — 흔들리지 않는다.
7월. 클로징.
서류 사인. N사 본사. 부사장님은 — 그 자리에 안 나오셨다. 대신 — 투자팀장 한 분이 — 사인한 서류를 우리에게 건네 주셨다.
"…류 대표님."
"…네."
"…부사장님께서 — 한 마디 —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네."
"…국내를 넘어서 세계 최고의 클라우드 사업을 — 함께 — 키워나가보자 — 한 마디만."
나는 그 자리에서 — 답을 못 했다.
5월의 회의실에서 내가 한 그 답이 — 두 달 뒤 — 부사장님의 한 마디로 — 다시 나에게 돌아오고 있었다.
저희가 만들고 있는 것이 — 한국에서, 그 다음 — 세계 어디서나 — 코드를 짜는 사람들이 — 한 번은 거쳐 갈 자리가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국내를 넘어서 세계 최고의 클라우드 사업을 — 함께 — 키워나가보자 — 한 마디만.
이 두 줄 사이의 두 달이 — N사가 우리 회사에게 한 — 첫 번째 받아들임 의 한 형태였다.
2015.07.[XX] / 19:30 / 어머니께 전화
클로징 그날 저녁, 나는 — 어머니께 전화를 드렸다.
"…엄마."
"…응?"
"…저 — 회사 — 어느 큰 회사에서 — 투자를 좀 — 받았어요."
전화 너머에서 어머니가 잠시 말이 없으셨다.
"…그게 — 뭔데."
"…그 — 회사 — 잘 되라고 — 어떤 회사가 — 돈을 좀 — 빌려준 — 비슷한 거예요."
"…빌려준 거? 그러면 — 갚아야 하는 거니?"
"…아니요. 갚는 건 아닌데. 그냥 — 회사가 잘 되면 — 그 회사가 — 같이 — 그 좋은 결과를 — 가져가요."
"…그러니까 — 너 회사가 — 잘 되고 있다는 거지?"
"…네."
"…박사도 — 잘 하고 있고."
"……."
나는 그 자리에서 답을 못 했다.
7월의 그 저녁, 어머니께서는 — 내가 박사를 잘 하고 있는지를, 내가 회사를 잘 하고 있는지와 같은 자리에서 — 한 번 더 — 물어 주셨다.
같은 자리에서 두 가지를 동시에 묻는다는 것은 — 어머니께서 — 약속의 두 쪽 을 잊지 않으셨다는 뜻이었다.
회사의 한 쪽은 — 잘 되고 있다고 답할 수 있었다. 박사의 다른 쪽은 — 그 시점의 나는 — 답할 수 없었다.
답할 수 없는 한 쪽을 — 어머니께 어떻게 전해 드릴지를, 나는 그 저녁에는 — 한 번도 정직하게 시작하지 못했다.
2015.08.[XX] / 09:15 / 산학협력관 201호(회귀)
다음 달 어느 아침, 회사 통장에 억 단위의 첫 송금이 들어왔다.
석유남이 화면을 한 번 더 들여다보고는, 자기 책상으로 돌아갔다. 그 친구는 — 그 오전에 — 평소보다 한 박자 천천히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 한 박자의 천천함이, 그 친구가 그 자리에서 — 회사의 그 한 단위의 변화를 — 자기 안에 자리 잡게 하고 있는 — 한 가지 동작이었다.
나는 그 친구의 등을 한 번 봤다.
다섯 명의 회사가 — 어느 외부 자본을 한 번 받아들인 회사가 됐다.
받아들인다 라는 단어의 정확한 무게를 — 그 시점의 우리 두 사람은 — 한 번도 정직하게 가늠하지 못했다.
가늠하지 못한 채로 — 다음 라운드의 미팅 일정이, 다른 회사들로부터 — 메일함에 — 하나씩 — 도착하기 시작했다.
— Episode 1. 끝